빈 집 / 기 형 도
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
잘 있거라, 짧았던 밤들아
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
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, 잘 있거라
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
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
잘 있거라, 더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
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
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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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형도 시인의 마지막 시 (1962 ~ 1989)
사랑을 떠나 보낸 집은 집이 아니다
빈 집이고 빈 마음이다
잠그는 방향이 모호하기는 하지만
문을 잠근다는 것은 내 사랑으로 지칭대는
소중한 것들을 가둔다는 것이고
그 행위는 스스로에 대한
잠금이자 감금일 것이다
사랑의 열망이 떠나버린 나는
빈집에 다름 아닌 그 빈집이
관(館)을 연상시키는 까닭이다
삶에 지독한 열망이 사랑이기에
사랑의 상실은
죽음을 환기하게 되는 것일까?